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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노트

아키의 '무중력학 개론'이 교육잡지 민들레에 실렸습니다.







무중력학 개론 : 386과 무중력 세대 사이에 통신 위성을 쏘아 올리다

 

이충한(아키) 유자살롱 공동대표. www.yoojasalon.net, akiiyooja@gmail.com

 

지난 <민들레> 80호에 ‘무중력 상태’에 빠진 청소년들에 대해, 그리고 유자살롱이라는 사회적기업이 그들과 어떤 만남을 가져왔는지 살짝 소개했다. 이번엔 좀 더 스케일을 넓혀서, 실은 ‘무중력 상황’이 단순히 학교를 떠나 집에서 머무는 몇몇 청소년들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다. 근데 좀 걱정되기도 한다. ‘무중력학(?) 개론’을 풀어 낼 강사인 나 자신이 충분히 준비되고 정리된 상태가 아니어서. 그래도 일단 한 번 시작해보기로 하자.

 

‘무기력’이 아닌 ‘무중력’의 상황

유자살롱이 정의하는 무중력 상태란, ‘학교나 친구, 직장 같은 사회의 중력장에서 벗어나 혼자 고립된 채 오랜 기간 지내는 것’을 뜻한다. 좀 더 덧붙이면 ‘심한 외로움, 가치관의 혼란과 우울감, 낮아진 자존감과 에너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눈치 챘겠지만 흔히들 ‘무기력’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상태다. 그런데 우린 ‘무기력’ 대신 ‘무중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무중력’이라는 단어는 그 상황이 지닌 문제와 가능성을 동시에 연상시키고 싶어서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선택한 결과다.

사람이 무중력 상태에서 둥둥 떠다닌다는 건 정말로 외롭고 힘든 일이니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다. 또 지금은 무중력 상태에 빠져 있더라도, 적절한 기술을 배우거나 동료를 만난다면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변 환경(중력장)을 바꾸고 여러 사람들과 손을 잡을 때 가능한 일이다.

 

열여덟 살 A군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혼자라고 느꼈다. 같은 반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노력도 나름 열심히 했지만 왠지 잘 안 풀렸고, 그만큼 실망도 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은근한 따돌림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중학생이 되니 자신이 교실 속의 섬 같이 느껴질 때가 잦아졌다. 그렇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뒤부터, 학교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어느 날 학교를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니 편안하고 좋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이내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비어 있음’이 찾아왔다. 한 점 빛도 없는, 칠흑 같이 어두운 무중력 우주 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점점 나빠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추락의 끝과 방향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괴롭긴 하지만,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부모님들의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올 때면, 주인공이 갑자기 벌레로 변해 방안에 갇혀버리는 카프카의 ‘변신’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유자살롱에서 상담하고 관찰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어쩌면 크게 드라마틱하지도 않은, 별다른 결함이나 잘못도 없고, 크게 불만을 갖거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에너지는 바닥이 나버린 아이구나 싶을 수도 있다. 얼핏 보면 A군은 그냥 나약하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온 ‘좀 모자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무중력 상태’라고 할 청소년들은 대부분 학습 능력이 평균 이상으로 뛰어나고 행위의 도덕적 기준이 오히려 무척 뚜렷한 편이다. 이 점에서 소위 전통적 의미에서의 ‘학습 부진 청소년’이나 ‘비행 청소년’과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집단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감수성 예민한 10대 청소년들 뿐 아니라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청년들도 이런 무중력 상황을 많이 겪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무중력 청소년 이야기를 하다보면 주변에 비슷한 무중력 상태에 빠진 친구가 있거나 스스로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대답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을 몇몇 이상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 문제’로 받아들인다.

 

과중력 세대와 무중력 세대, 부모와 아이 사이의 통신 두절

청소년이 무중력 상태에 빠지기까지는 타고난 성향, 학교와 가족 안에서의 상호작용, 외부의 직접적 충격과 트라우마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가정과 학교인데, 그 공간에서는 날마다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세대 간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갈등을 더욱 부채질한다. 화성남자와 금성여자에 버금가는 큰 차이가 지금의 10대와 이들의 부모인 40대 사이에 존재한다. 서로 속해 있는 중력장이 너무도 다르다. 따지자면 지구별과 안드로메다 구석 어디쯤의 차이랄까. 발 딛고 있는 땅이 다르고, 참조하는 사전도 완전 다르니 소통이 될 리 없다.

이 두 세대를 중력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의해보면, 40대는 과중력 세대, 10대는 무중력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의 40대는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 전인 전근대적 문화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70~80년대, 그들의 청소년기 또는 청년기에는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비합리적이고 가난한 부모, 폭압적인 정권과 거리 두기(밀어내기)가 성숙에 이르는 길이라 여기며 자랐다. 성인이 된 뒤에는, 강렬한 소속감을 주는 저항문화 혹은 청년문화와 미래의 진보된 사회, 그리고 경제적 풍요에 대한 희망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권위주의적 사회가 주는 ‘척력(밀어내는 힘)’과 물질적 풍요를 갈망하는 욕구인 ‘인력(끌어당기는 힘)’이 동시에 존재하는, 강력한 중력장에 속해 있었던 셈이다. 그들 중 정치적으로 각성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른바 ‘386’)은 전근대에서 탈출해 개인의 자유의지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근대사회 만들기를 지상의 과제로 여겼고, 그 결과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어느 정도 획득하게 되었다.

반면 겨우 한 세대 아래인 현재 10~20대의 상황은 굉장히 다르다. 지금은 척력도 인력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군부정권에서 벗어난 이후, 소비사회화가 막 시작된 90년대에 태어났지만, 97년 경제위기와 2000년대 신자유주의화를 겪으면서 막연한 경제적 불안감과 정치적 허무주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 깊이 새겨진 그런 세대다. 이들에게 부모와 사회는, 모순덩어리가 아닌 그냥 ‘구리면서도 적당히 합리적’이어서 딱히 불평할 지점이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렇다고 정치적, 경제적 진보를 믿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열정을 아무리 투여해봤자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이럴 때에는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덜 구리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몇 세대에 걸쳐서 일어날 변화가, 한국에서는 단지 한 세대 만에 일어난 셈이다. 게다가 ‘기울기’의 차이도 심각하다. 개인과 사회 전체의 부(富)가 동시에 쭉쭉 상승하는 기울기를 가진 사회와 체감소득 증가율이 마이너스인 승자독식 양극화 사회는 마인드셋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할 숙제가 바로 40대와 10대, 과중력 세대와 무중력 세대 간의 통신두절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 연속해서 보도되고 있는 청소년 자살에 대한 교육·경찰당국의 말도 안 되는 대책들, 사태의 본질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전문가 그룹들을 접하면서 누군가 이 둘 사이를 중계해주지 않고서는 이 문제가 절대 해결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과중력 세대와 무중력 세대 사이의 사람들, 30대 초중반의 소심한 ‘저중력 세대’가 ‘통신중계 위성’으로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중력장 간 번역기를 만들어야 할 때

저중력 세대란 90년대 중반 전후에 20세가 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집단이나 조직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문화적 욕구가 강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한국이 경제적, 문화적 모멘텀을 이룬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으나, 곧바로 97년 경제위기를 만나면서 대안적 세대로서의 에너지를 잃고 말았다. 쉽게 말하자면 ‘서태지 세대’라고 할 수도 있겠고, 대학문화를 중심으로 보면 ‘탈운동권-학부제 세대’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나 역시 76년 생 저중력 세대로서 20대 때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적 부채의식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혼란스러웠고, 사회에 나와서부터는 윗세대와 여러 가지로 충돌하면서 이들과 우리 세대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과중력과 저중력 세대 역시,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40대 입장에서 30대는 탈정치화되고 근성이 없으며 자기주장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의지박약 디지털 중독자 피터팬으로 보이고, 30대 입장에서 40대는 지난날의 성과 위에 걸터앉아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소통불능 디지털 문맹 꼰대로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세대 사이의 애증은 ‘절반의 이해’ 위에 자리 잡고 있기에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잘 헤아려 보면 두 세대가 여러 분야에서 멋지게 협력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40대와 10대, 과중력과 무중력 세대 사이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20세의 B는 대학에 진학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연히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졸 취업준비생도 재수생도 아닌 어중간한 무중력 상황에 빠졌다. 집안 환경에서도 그다지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B의 하루는 공무원인 아버지와의 아침식사로 시작한다. 2~3일에 한 번, 식탁에서 아버지는 B의 ‘계획’을 묻는다. B는 힘들고 막막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계획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B가 못마땅하지만 아이가 유약하니 화를 낼 수도 없다. 여기까지만 해도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별로 특이할 것이 없는 보통 집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침묵이 한 시간 넘게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건 차라리 매를 맞는 게 낫다. 대화(?)의 막바지에 이르면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왜 대화를 하지 않느냐”고 재촉하고, B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남는 것은 세 글자, ‘자.괴.감’뿐이다. 이런 상황이 몇 달 동안 계속 되어 왔다.

이 사례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에게 나쁜 의도가 전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B의 에너지를 바닥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세대의 부모들처럼 비이성적으로 언어적, 신체적 폭력(밀어내는 힘)을 가할 경우, 아이는 거기에 맞는 힘(가출, 반항 등)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B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탓할 어떤 핑계도 논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비난과 미움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만다. 이처럼 ‘나쁜 의도가 아닌 건 아는데, 이상하게 괜히 사람 옥죄면서 기를 죽인다’는 불평은 30대 직장인들이 40대 상사들에게 갖는 흔한 불만이기도 하다. 이들의 상호작용은 접점을 갖지 못하고 있기에 갈등이 해소되지도 못하고 싸움이 되지도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게 된다.

다음으로, 얼마 전 엄기호씨가 칼럼을 통해 이야기한 “그냥요”라는 아이들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요즘 아이들은 나쁜 짓을 왜 했냐고 물어봐도 “그냥요”라고 하고, 해야 할 일을 왜 안 하느냐고 물어도 “그냥요”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의미 과잉의 사회를 살고 있고, 사실 모든 사람이 때때로 ‘무의미’의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는, 깊고 철학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이 쳐 놓은 ‘의미의 그물망’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행위의 배경에 의미를 부여하고, 근면과 성실성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자꾸 “그냥요”라는 말 뒤로 숨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기 싫어요”라는 말도, 능동적인 부정문이 아니라 “부딪혀 볼 엄두가 안 나고 실패할 것이 두려워요”라는 뜻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답이나, “잘 못해도 된다. 하지만 넌 잘할 거다.”라는 격려가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물론 정말로 하기 싫은 경우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아이들에게 말을 걸면서 마음 속 대답을 듣고 싶다면, 내가 나만의 틀과 정답을 이미 갖고 있지는 않은지, 배려라는 이름으로 이 아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폭력은 광기 어린 독재자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적인 부모도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물론 기가 눌려서 힘든 상황은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닌, 관계의 비대칭에서 비롯되는 ‘불행한 사건’일 뿐이다. 다만 아이 입장에서 이 불행을 풀어낼 여력이 없으니 힘을 가진 어른이 애를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주변의 아이가 무중력 상황에 빠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위의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하다가 아이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면 무중력 상태가 아닐까 의심해보아야 한다. “나는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자해나 자살을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어른들로서는 기가 막히는 말이다. ‘우리’가 ‘나’의 앞에 놓여 있던 시대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저중력, 무중력 세대가 종종 이런 생각들을 갖고 사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사라진 세계, ‘나’ 이외에는 모두가 경쟁상대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결국 무중력 현상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환경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지는 의지나 기력도 사실 환경과 결부되어있는 것이 당연하다. 좋은 결과를 상상할 수 없을 때 의지가 생길 리 없고 심리적으로 굶주린 사람에게 기력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마지막으로 부모 세대가 알아야 할 단어는 ‘멘붕’이다. ‘멘탈 붕괴’라는 무시무시한 뜻을 가진 이 유행어 자체를 굳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진정한 멘붕도 가끔씩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울하다, 외롭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 이것은 보편적으로 인간이 가끔씩 마주치는 심리적, 관계적, 의지적 어려움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이 리얼 트리플 멘붕이다. 이 트리플 멘붕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아이는 이 ‘멘붕의 버뮤다 삼각지대’ 안에서 혼자 길을 잃고 무중력 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빨리 이들을 꺼내지 못하면 이들을 영영 되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윗세대가 겪었던 전쟁, 질병, 가난이나 억압과는 또 다른, 매우 아프고 힘든 시대적 비극이다. 그 비극이, 바로 이웃 나라 일본에서 ‘히키코모리’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이 아이들을 사회의 중력장 속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미는 힘이 아닌 당기는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걱정이 되어도 어른이 더 당황해서는 안 된다. 아무 조건도 생각하지 말고, 결국에는 아이가 잘 될 것이라고 믿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나 교사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가진 자아의 경계를 무시하고 ‘흙발로 남에 방에 저벅저벅 들어가는’ 방법을 써서도 안 된다. 최대한 아이를 존중해 주면서도, 전문적인 노하우를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빨리 도움을 청해야 한다.

 

‘중력’의 안경을 끼고 사회를 바라보기

내가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무중력화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왜 우리는 아직 그 결과를 자주 목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청소년과 청년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과중력 시대의 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나 학생이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훔치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대들면 ‘큰 문제’라고 인식하지만,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며 교실이나 방안 구석에서 조용히 지내면 크게 문제로 보지도 않고 별다른 관심이나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소위 ‘문제아’나 ‘노는 아이’ 혹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가해자 청소년’의 경우를 보자. 이들은 자체의 운동 에너지는 높은데 잡아끄는 사회적 인력이 이들을 땅 위(사회)에 잡아놓을 정도로 강하지 못해 중력장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경우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관성에 따라 자유 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더 강한 자극(약물 등)이나 소속(폭력 서클 등)의 인력 쪽으로 끌려가기도 한다. 때때로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선배나 교사에게 오히려 마음을 주고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도 이런 이끌림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청소년기’라는 이름으로 강한 구속의 경계를 만들어놓고, 이 중력장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어른들로서는 이들의 이동 궤적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이들을 ‘청소년 조폭’ 쯤으로 보면서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범생’이라는 겉모습을 한 채 현 사회의 모순적 중력장 안에 머무르는 아이들 역시 안심할 수는 없다. 이들 중에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라는, 내면에 주입된 자체엔진이 주는 부작용과 지나친 압력으로 인해 서서히 안으로부터 압사(壓死)해 가는 경우가 많다. 최근 강남구나 목동, 분당 등에 아동정신과와 심리상담소가 급증하고 있는 것만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20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높은 압력의 중고등학교를 견뎌내고 대학에 간 청년들을 만나보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신을 관찰할 여유를 가져본 적도 없고, 이 사회에 매력적인(끌어당기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니트(NEET: 일자리도 없고 교육이나 훈련도 받지 않음) 상황, 심리적으로는 사회적 위축(Social Withdrawal) 상태에 놓이면서 행태적으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고 싶은 것이 아닌데도, 될 거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고시생과 취업준비생, 집단 내에 동화되지 못하면서도 억지로 참고 사는 직장인 등이 많아서 표면화되지 않을 뿐, 이러한 ‘무중력 청년’ 문제는 몇 년 내에 가계 부채나 부동산 거품을 능가하는 한국사회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

 

해결의 첫 걸음: 세대 간의 조건 없는 신뢰로 연결된 중력의 그물망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과중력장과 무중력장 사이에 무수히 많은 계단을 만들고, 떨어질 때의 두려움과 올라갈 때의 어려움을 줄이면 된다. 공교육 학교와 대안학교, 그리고 홈스쿨링과 무중력생활 사이에 촘촘한 중간 단계를 만들고 이들이 서로 호환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한 청소년이 정규 트랙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와 다시 들어가게 될 때, 각 단계별로 충분한 정보 및 프로그램 교류가 일어나서 충격과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면 ‘무중력화 연착륙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많지는 않겠지만 대안학교 내에서도 휴학, 자퇴, 비진학 청소년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시기에 유자살롱과 같은 ‘도움닫기 발판’ 프로그램과 연계한다면 분명히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의 졸업 후 노동시장 이행, 은퇴자들의 생활 세계 이행 과정에서도 이러한 계단식 시스템이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사회가 근본 원리부터 수정해야만 하는 시기가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속도, 압력, 피로 등,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상 웃어넘기거나 묻어뒀던 한국사회의 본질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뚜렷하게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탈핵 논의가 (환경보전과 생존의 문제를 넘어) 한국이라는 ‘압력밥솥 사회’ 전반의 구동 원리를 점검하게 된 것처럼, 최근의 청소년 자살사태는 우리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는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자기 심장의 템포에 귀를 기울이고, 그 템포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고,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지금까지 모두가 고속도로 위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온 탓에 속도 감각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속도로 건설 이전의 기억을 지닌 노년층과, 새로운 것을 만들 마음의 힘이 남아있는 386세대, 30대 저중력 세대와 현 시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체득한 무중력 세대가 모두 함께 귀 기울이면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차이에 기반한 ‘세대갈등’이 아닌, 동일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연대감일테니 말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과중력과 무중력 세계 양쪽의 속도와 중력에 대한 정보가 있는 30대가 통신중계위성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유자살롱은 그동안 무중력세대와 소통하며 귓속말로 “괜찮아, 나도 그랬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 왔지만, 앞으로는 좀 더 큰 목소리로 과중력세대의 부모와 교육계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무중력 통신위성이 중계하는 첫 메시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