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진 선생님(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 청소년동반자)의 후기
- 집밖에서 유유자적 프로젝트를 만나고 나서 -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 이 아이가 정말로 변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습니다. 덥수룩하게 어깨 근처까지 닿은 머리, 길게 기른 손톱과 발톱, 자다가 일어났는지 멍하게 풀린 눈...... 그랬던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나가는데만 3주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 같고, 과연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같이 일하는 선생님께서 “이 프로그램 어때요? 걔한테 딱 일 것 같은데” 라고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과연 아이가 갈까? 과연 가서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걱정되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는 “네가 좋아하는 악기 구경하러 가보자. 가서 맘에 들면 쳐보기도 해보자” 라는 말도 꼬셔서 방문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걱정했던 대로 “까먹었어요.” , “선생님 꼭 가야해요? 오늘은 졸려요.” 라며 자주 결석을 했고, 아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아이 담당 선생님께 오히려 민폐만 끼치는 것이 아닌지 점점 걱정이 되었습니다.그러다가 선생님들께서 멘토를 붙여주셨고, 그 멘토와 함께 아이는 프로그램에 자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서 어땠어?”라고 물으면 “그냥 그랬어요.” 라는 대답에서 “오늘은 운동했어요.” “오늘은 농구 했어요.” “오늘 어떤 누나랑 같이 이야기 했어요. 그 누나도 같은 선생님이래요. 잘해줘서 좋아요.” 라고 점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 시작했고, 아이의 얼굴도 점점 활기가 돌았습니다.
머리도 더 이상 덥수룩하게 기르지 않고 단정하게 자르고, 옷도 나름 신경 써서 입고, 나갈 때 세수를 하는 등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중간 발표회 때, 앞에 나가서 공연을 하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앞에서 공연을 하고 “아쉬워요” 라는 말이 나왔을 때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경험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서 다시 아이가 그때로 다시 되돌아갈까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약 1달이 지난 지금 아이는 이젠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선생님 저 안 씻었어요. 씻고 나갈게요.”, “저 친구랑 약속 있어서 나가서 오늘 못 봐요. 내일 하자센터 가는 거 알고 있어요. 챙겨서 갈게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3개월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아이가 이제 자기 스스로 세상에 한 발자국을 딛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공기처럼 둥둥 떠다니고 희미했던 아이에게 하나의 끈이 되어 주신 <집밖에서 유유자적>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유자살롱의 오랜 친구, Y의 수기
- 유자살롱에서의 1년 -
작년 3월, 난 하자센터라는 곳에 처음 방문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정말 나에겐 무서운 곳이었다 (난 낯선 것은 뭐든지 두려워한다).
그 때 하자센터 안에 있는 예비 사회적 기업 유자살롱에서 난 경계와 두려움을 가득 품고, 두리번거리며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그리고 노는 포스 팍팍 풍기는 '쥐'라는 강사에 의해 난 더 벌벌 떨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질 쯤, '이슬'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고, 난 수강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 날 방문한 이유는 또 한 명의 강사인 '한군'에 의해서였다. '한군'은 2009년 가을, 나의 상담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2010년 2월, 홍대에서 그의 친구와 함께 처음 만났다. 그 때, 하자센터라는 곳에서 기타를 가르치게 됐는데 한번 배워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한군'을 만나고, 하자센터에 방문했던 일들은 나의 약 1년간의 은둔 생활에 마침점을 찍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유자살롱에서 <밴드 아카데미>의 수강을 시작하게 되었고, 3~4월에는 기타 수업을, 5~7월에는 베이스, 일렉기타, 드럼, 미디, 키보드 수업을 복합적으로 받았다.
4월부터 시작된 <CA 활동>을 통해 다른 3명의 밴드 아카데미 수강생을 만났고, 이후 유자살롱에서 잠시 인턴을 했던 다른 아이까지 더해져 5인조 밴드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음반 발매를 위해 준비 중이다.
어쨌든 이리저리 하여 <밴드 아카데미>는 7월에 막을 내리고, 9월부터는 니트족, 히키코모리, 탈학교 청소년들 (유자살롱에서는 '무중력 청소년'이라고 부른다)을 위한 <집밖에서 유유자적>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어색해하고, 하자센터를 무서워 하던 아이들도 점차 예전의 나처럼 밝은 기운을 발산 (!) 해내기 시작하였다.
서로 이야기도 하고, 합주도 하며 스파이더 맨처럼 관계의 끈들을 슈슈슉 발사해 댔고, 총 3~4번의 크고 작은 공연들을 끝마친 우린 어느새 모두 친구가 되어있었..다... (오글) 그리고 난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하고 있는 K를 약 한 달 동안 집에서 데려오는 임무도 맡았었다(생색내기). 보조강사라는 명분 아래.
작년에 <밴드 아카데미> 수강을 쉴 때도, <집밖에서 유유자적>프로젝트가 끝난 지금도 난 하자센터에 간다. 놀러 가든, 음반 작업을 위해 가든, 공연을 보러 가든, 다른 프로그램을 들으러 가든.
하자센터와 유자살롱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과, 시각들과,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두번째 집 같은 느낌?
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러 가고 싶은 생각이다. 너무 내 자신이 갇혀 있는, 집에 박혀 있을 때와 별 다를 게 없어졌다는 생각에.
<집밖에서 유유자적>프로젝트 1기 어머니들과의 대화
참여: Y의 어머니, S의 어머니, 구, 전조, 아키
일시: 2011년 1월 11일 (2~5시)
장소: 유자살롱 사무실
※ 인터뷰 참여자의 요청으로 가명을 썼음을 밝힙니다. '구', '전조', '아키'는 유자살롱 멤버들의 별명입니다.
프롤로그
<집밖에서 유유자적>프로젝트 1기가 끝나고, 유자살롱은 지난 3개월의 과정을 돌아보며 정리의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동시에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프로젝트 1기 친구들 중 Y와 S의 어머니들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모임이라기보단,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가족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중요한 자리라고 볼 수 있었다.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어머니 중 한 분이 귤을 사오셨고 우리는 귤을 까먹으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 Y는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중학교를 그만둔 뒤, 1년여 동안을 집 안에서만 지낸 시절이 있었다. 작년, 유 자살롱과 인연을 맺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함께 한 뒤, Y는 일종의 시니어(senior)로서 <집밖에서 유유자 적>프로젝트에 참여했다.
- S는 초등학교 재학 중 억압적인 선생님과의 불화로 등교거부를 시작해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2년째 주 로 집에서 지냈다. 타 청소년기관의 소개로 <집밖에서 유유자적>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구)
구)
S가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안 만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나요?
그리고 초등학교 때 선생님과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합니다.
S의 어머니 - 이하 S)
S가 5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내외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담임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반이 됐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안됐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아이는 역설과 체벌로 학생들을 숨도 못 쉬게 하는 폭압적인 선생님 때문에 학교를 무서워하기 시작했어요. 학교가 가기 싫어서 방에서 나오기를 거부했고 급기야 나중에는 왜 살아야 되냐며 울고, 밤에 자다 말고 느닷없이 ‘선생님 죽일 거야!’ 라고 소리를 지를 지경이 되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위장전입을 해서 학교를 옮겼는데 거기서는 유난스러운 급우 한 명이 '왜 너희 동네 학교 놔두고 이 학교로 왔느냐' 며 괴롭히는 것이었어요. 이미 한 번 학교라는 것에 데인 경험이 있는 아이는 결국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죠.
그래도 중학교 1학년 말까지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가끔 축구도 하고 피씨방에도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애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애들과 자기의 대화 주제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결국 만나지 않게 된 거죠.
그리고 나서는 또래 애들이 등하교를 하거나 돌아다닐 시간에 바깥 출입을 피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시간대가 늘어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거죠.
구)
요새는 S와 가족분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S)
검정고시를 봐야 내년에 고등학교를 올라 갈텐데.
아직 멀었다는 핑계로 검정고시 학원이나 과외 얘기하지 말라고 해요. 작년쯤 검정고시 책을 사오더니 좀 하는가 하더니 요샌 안 보는 것 같아요.
구)
S 부모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S 스스로가 생각하는 게 차이가 많이 날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다른 방식을 찾아야지, 이제 나이가 됐으니 다시 고등학교로 들어가야 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으니까요.
S)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내가 면허증을 늦게 땄는데, 따놓고 자신 없어서 운전을 못 하니까 '그렇게 자신 없어할 거면 면허를 왜 땄냐'고 하더라구요, 유치원생이. 그 한 마디에 마음 굳게 먹고 했죠.
그렇게 마음이 강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희망이 없다', '자신이 없다'고 해요. 나가서 사람 만나면 불편해하고. 그나마 여기 오는 걸 편해하죠.
지난번에도 '엄마, 나 유자살롱에 갔다 올까?' 하고 가더라구요. 그래도 혼자 나가겠다는 것이 좋아서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했어요. 그런데 그날은 안 갔고, 일주일 후에 갔다 왔다더군요.
구)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셨지만 처음엔 많이 힘드셨을 거에요.
S)
위에 여자애 둘 키울 때는 쉽게 갔고, S도 5학년 때 선생님 만날 때까지는 평범하게 갔는데... 학교 그만둘 때는 눈물로 지새고 누구한테 얘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혼자 격해져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제는 별로 걱정을 많이 안 해요. 사람 사는 방법이 모두가 똑같이 갈 수는 없는 거라는 걸 받아들이구요.
우리 아이가 지금은 많이 밝아졌고, 저한테도 기대고 아껴줘요. 예전엔 방문 밖으로는 밥 먹으러만 나오고 친구들 만날 시간에 밖에도 안 나가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것 없이 얼굴도 많이 밝아졌어요.
이제는 걱정 안 하고 괜찮아요.
구)
저희가 Y 얘기를 처음 들은 게 작년 2월이었습니다. 대인기피가 있던 Y가 '한군'(유자살롱 강사)과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마음의 벽을 깬 후, 용기를 내어 '한군'을 만나러 나왔던게 시작이었죠.
당시, 저희는 음악으로 일상을 조직해줄 수 있는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를 배우는 것보다 또래집단을 만나는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Y가 같이 하게 된거구요.
Y의 어머니 - 이하 Y)
2~3년을 또래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만나서 좋았던 것 같아요.
오늘도 하자센터에 간다고 했더니, 어떤 엄마가 만나자고 했냐 물어는 봤지만 의외로 반응이 담담하더라구요. 옛날 같으면 왜 가느냐고 했을텐데 말이죠. 애가 많이 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자주 화를 내고 폭발적으로 흥분하고 그래서 눈치를 보곤 했는데, 이제는 그랬던 내가 미안할 정도로 성격이 안정되었어요.
구)
Y가 작년에 많은 변화가 있었죠. 처음에는 눈도 잘 못 맞추다가 나중에는 프로젝트에서 시니어 역할까지 잘 해냈어요.
하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엔 '외부사람과의 교류는 좋아졌지만 가정 내에선 아직 전쟁 같은 상황이 있기도 한다' 는 얘기가 있었는데, 요샌 집에서 어떤가요?
Y)
지금은 정말 많이 성장했죠. 아이가 밖으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가면서 서서히 바뀐 거에요. 저희도 굉장히 편해졌어요. Y도 많이 유해지고.
CA를 하면서 더 그랬고, 프로젝트를 하면서부턴 자존감도 높아진 것 같아요. 프로젝트 중 한 친구를 집에서 데리고 오는 역할을 맡아서 했는데, 자신이 누구에겐가 필요한 존재라는 게 좋았던 듯 싶어요. 자기가 조금씩 서니까 남들을 걱정하기 시작하고,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니까 자기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 소속되어있다는 것 때문에 180도로 바뀌게 된 거죠.
가정도 편안해졌어요. 누나도 Y의 후유증으로 집에 있고 그랬어요. 가족이다보니 영향을 받아 누나마저 그런 게 오더라구요. 동생 때문에 손해봤다는 느낌이 많았던 거죠.
지난 얘기는 그렇고, 여기 오면서부터 굉장히 바뀌었어요.
구)
Y가 유자살롱에 오기 전까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Y)
여기 오기 전에 가족 모두가 상담을 받았어요. 만 2년째 받고 있는 것인데, Y는 1년 2개월 정도 받았죠. 그러면서 또래와 어울리면 좋을 것 같아서 '한군'을 만나게 된거구요.
유자살롱에 와서 얘기도 하고 싶긴 한데, Y가 무엇인가 할 때까지 참견 안 하고 기다려줘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래 기다렸죠. '이곳에 몇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관련되지 않아도 챙겨주면서, 이해해주면서 끌어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믿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 부끄럼은 많이 타도 친구들도 많이 놀러오고, 집안에서도 공부 잘하고 그러니까 기대를 많이 했었죠. 피아노 치는 것도 그렇고, 악보 보는 눈하고 듣는 감이 좋으니까 그쪽으로 시키라고, 선생님이 추천하셨어요. 저희 생각엔 그래도 남자아이여서 적극적으로 밀어주지는 않았지만요.
구)
그 대목에서 생각나는 게 있어요. 제가 여러 어머니들을 만나 뵙고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니트라고도 하고 히키코모리라고 하는 정적인 친구들이,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아요. 한편은 가족에서 방임된 경우, 다른 한 편은 Y나 S 그리고 다른 친구들처럼 또래 애들보다 감각이 발달해 그게 문제라면 문제가 되어버린 경우.
예를 들면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또래들은 참는데 이 아이들은 참을 수 없는 거죠. 그건 옳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니까요.
이 친구들은 몸이 다르게 태어난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감각이 살아있는 친구들은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없는 거에요. 무던하지 못한 거죠. 우리 아이들이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는 걸 모두 알았으면 합니다.
그건 아이들의 잘못, 가족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의 잘못입니다.
S)
동네에서 같이 운동 다니는 분 중에 초등학교 은퇴하신 분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 언니가 하는 얘기가 '똑똑하니까 집에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고 그러더라구요.
충분히 혼자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지금은 공부라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뭘 할까 하는 생각을 하는 단계예요. 아이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구요.
Y)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Y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인데 우리는 애쓴다고 더 푸쉬하고... 그러니까 자기를 이해 못해준다는 데 더 화가 나고 그랬을 거 같아요. 애가 똑똑하고 순하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는데 왜 우리 애만 그럴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긴 시간을 지내고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맣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내가 지금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아야 하는데 하자센터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 아이를 생각한다면서 부리게 되는 욕심을 잘라내는 일 말이에요.
S)
어려운 일이에요.
작년에 다시 대안학교에 가보려고 하다가 일이 있어서 못 가게 되었는데 S가 울면서, 내가 학교 안 간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왜 그냥 둬서 또래들이랑 못 놀게 놔뒀냐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고등학교는 또래 애들이랑 같이 가고 싶다고 하구요.
Y)
Y도 똑같은데.(웃음) 부모로서, 부모가 어느 선에서 얼마만큼 뭐를 해줘야 하는지 판단이 어려워요. 밀면 밀었다고, 댕기면 댕겼다고, 가만 두면 가만 뒀다고 뭐라고 그래요.
누나도 Y만 예뻐한다 하고 주위 어른들은 오냐오냐 키웠다고 하고. 하지만 억울한게, Y가 자라는 동안 야단칠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아키)
'부모님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부모님은 30년 전의 사전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 사전에는 아이폰도 없고 트위터도 없어요. 그런 것처럼 부모님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최선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거죠. 그걸 '구'는 '아이들의 몸이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이구요.
'누구 때문에, 왜 이렇게 됐을까' 를 계속 생각하게 되시겠지만, 지금 '이 상태다'라는 현실인식과 '좋아지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Y)
힘들었지만, 아이들에게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큰 애가 정리를 잘 안 해서 방을 치워주면서 뭐라고 하니까, Y가 '치우지 말던지, 치워 줄거면 말을 하지 말던지'라는 얘기를 해주는데, 어? 이 말이 맞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구더기가 나오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두니까, 오히려 너무 지저분하면 큰애가 스스로 치우는 거에요.
이런 일들을 통해 내 문제와 아이의 문제를 분리하는 법을 배워요. 그전처럼 살았다면 저는 계속 아이를 제 통제대로 제 틀 안에 들어오도록 애쓰고, 애는 애대로 힘들어 했겠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알아가는 거에요.
하지만 아직도 저는 주위 사람에게는 학교 다닌다고 얘기를 해요. 그게 서로에게 편해요. 작년까지는 학교 다니냐고 누가 물으면 깊이 받아들였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S)
원래 밝게 살았는데, S 때문에 우울해져서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 약을 먹으라고 하더라구요. 저도 2개월 정도 약을 먹었는데 약 먹는 과정에서 '아, 그게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울고 자책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거죠. 그래서 많이 웃으려고 힘을 내려고 노력했어요.
몇 년 지나고 나니까 S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게 됐죠.
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애들을 믿고 지켜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이런 얘기를 자주 나누어야 하구요.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모두 다른 단계니까요. 이제 막 힘들어하는 아이의 상황을 알게 되신 부모님은 얘기만 꺼내도 눈물을 흘리시죠. S어머니와 Y어머니가 그러셨듯이.
그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 아이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여기 계신 어머님들이 증명해주셔야 해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처럼 막막한 일이 없잖아요.
Y와 S가 지금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그걸 가족분들께서는 적극적으로 나누셔야 된다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부담이 되더라도, 그것이 다른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힘이 될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시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신데 대해 다시 한 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에필로그
어느덧 3시간이 흘렀다. 어머님들과 인사를 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역시 만나는 게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 자리를 정리하고 1층 까페에 놓고 온 무언가를 가지러 갔다. 그런데 그곳에 두 어머님께서 말씀을 나누고 계신 것이었다.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으리라. 혼자가 아니라는 게 아이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얼마나 큰 힘인지, 우리는 왜 계속 만나야 하는지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어느 옛 노래의 가사처럼 더 많은 아이들이, 더 많은 가족들이 만나고 또 만나야 한다.